학교의 역사 · 제3장
단수이중학과 단수이 여학원단수이중학과 단수이여학원
교사관의 중국어 원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둘이 다를 경우 중국어 원문이 기록입니다.
01교명의 변경과 팔각탑의 낙성
단수이중학교(淡水中學校)는 개교 이래 줄곧 옥스퍼드 학당(牛津學堂)을 교사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 건물은 규모가 한정되어 있었고 아름다운 여학교 교사는 이미 개축되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새 교사의 건축이 남자 중학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1919년 봄 일본 정부가 이 건축 계획을 위한 모금을 허가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화폐 1만 6천 원이 모였고, 동시에 캐나다에도 보조를 신청하였다.
1922년 2월 총독부는 「대만교육령」을 다시 공포하여 사립학교에 많은 제한을 두었고, 관립이 아닌 학교는 더 이상 '학교(學校)'라는 명칭을 쓸 수 없게 되었다. 10월에 남녀 두 학교는 각각 '사립 단수이중학(私立淡水中學)'과 '사립 단수이여학원(私立淡水女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체육관과 팔각탑 교사가 준공되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11년 동안 사용해 온 옥스퍼드 학당의 창교 시대는 끝났다. 푸딩(埔頂)의 언덕은 이로써 담강중학(淡江中學) 백 년 교정의 자리가 되었다.
1923년 6월, 새 교정에 케네스 다우이 선생(羅虔益, Mr. Kenneth Dowie, B. Sc.)이 설계한 매케이 기념 체육관이 낙성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건물은 북부 교회 설교 50주년 기념대회의 회장으로 쓰기 위해 먼저 지은 것이었다. 같은 해 말에는 역시 다우이 선생이 설계한 팔각탑 새 교사가 착공되어 1925년 6월에 낙성되었다.
학생들은 11년 동안 빌려 쓴 옥스퍼드 학당에서 새 교정으로 옮겨갔고(그 뒤 옥스퍼드 학당은 1931년까지 단수이중학 학생들의 기숙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팔각탑은 학교의 정신적 상징이 되었다. 동시에 매케이 박사가 그 가족에게 남긴 5천여 평의 토지도 중학의 운동장, 곧 오늘날의 럭비장으로 쓰였다. 새 교사와 새 기풍은 단수이중학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었다.
1925년 여름, 본래 대만어와 영어로 가르쳐 온 조지 윌리엄 매케이(偕叡廉) 교장은 시국의 압력 아래 국어(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1년 반 동안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일은 일본 정부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단수이중학과 단수이여학원은 종교적 정신으로 세워졌고, 서양의 인본주의 교육을 주체로 삼았으며, 대만의 자제를 교육 대상으로 하여 대만어로 가르치고 성경도 가르쳤으므로, 일본 군국주의의 황민화 정책에 용납될 수 없었다.
좋은 교사진과 아름다운 교정, 완비된 설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끝내 총독부의 '비안(備案)'과 정규 중학교로서의 '인정(認定)'을 얻지 못하였다. 당시 교육 자원이 일본인에게 독점되어 있던 상황에서 단수이중학과 단수이여학원은 대만인에게 귀중한 교육의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정책의 제한 때문에 남녀 두 학교의 학생은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응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자의 자제로서 신학교에 들어가려는 이를 제외하면 일반 학생은 대개 2~3년을 배운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따라서 과정을 마친 졸업생은 처음 입학한 인원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단수이중학은 개교 때부터 1935년까지, 매케이 씨가 국내에 없는 동안 선교사 다우이(羅虔益), 윌리엄스 목사(廉叡理, Rev. G. A. Williams), 코츠 목사(高華德, Rev. W. G. Coates), 딕슨 목사(孫雅各, Rev. James I. Dickson), 맥밀런 목사(明有德, Rev. Hugh MacMillan)가 잠시 대리를 맡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교장직을 모두 매케이 씨가 맡았으며, 그는 초기 단수이중학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교육학 석사였던 김인리(金仁理) 양은 여학교 교장을 13년 동안 맡아 학교에 좋은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27년 캐나다 교회가 교단 조직의 통합과 분리를 둘러싸고 이견이 생겼고, 그 여파가 해외의 대만에까지 미쳤다. 조직의 변화로 남녀 두 학교의 적지 않은 선교사가 직을 떠났다. 이듬해 김인리 양과 부학당(婦學堂)의 고합나(高哈拿) 양이 떠나고, 여마미 양이 여학원 교장을 3년 동안 이어받았다. 1931년에는 다시 도로시 더글러스 양(杜道理, Miss Dorothy Douglas)이 뒤를 이었고, 부학당은 알마 버딕(閔瑪利, Miss Alma Burdick)이 교장을 이어받았다.
02단수이중학의 럭비부와 합창단
단수이중학은 창립된 뒤 음악과 체육 양면에서 매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전통적인 배움의 환경과 자유로운 학풍과도 관련이 있지만, 스승들의 몸소 보인 가르침과 격려에도 일정한 영향이 있었으니, 그 가운데 진청충(陳清忠) 선생이 가장 대표적이다.
진청충은 단수이중학의 전신인 옥스퍼드 학당 보통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시샤대학을 졸업하였다. 1921년 모교로 돌아와 가르치며 문무를 겸비한 학풍을 이끌었다. 그는 전임 영어 교사였을 뿐 아니라 음악과 체육에도 전문성과 애호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남녀 두 학교는 오위렴 부인(吳威廉師母) 등 선교사들의 지도 아래 음악 면에서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다. 진청충의 조직과 훈련으로 대만 최초의 합창단인 '단수이중학 합창단'(TMS Glee Club)이 탄생하였다. 1926년 여름방학에 그는 합창단을 이끌고 일본을 순회 공연하였고, 그 뛰어난 연주는 해외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학생 단원 가운데 진사치(陳泗治), 낙선춘(駱先春) 등은 뒷날 모두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이 밖에 1931년 캐나다 왕립음악원을 졸업한 이사벨 테일러 양(德明利, Miss Isabel Taylor)이 매케이 교장과 함께 대만에 와 이 음악 교육의 일을 이어받았다. 그는 계획적으로 여러 음악 교육을 추진하였고 남녀 합창단을 조직하고 훈련하였다. 테일러 양은 전후에 다시 담강으로 돌아와 1973년 퇴직하여 귀국할 때까지 음악 교육에 종사하였으며, 음악을 담강의 가장 자랑스러운 학풍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담강을 대만 근대 음악의 발상지가 되게 하였다.


진청충은 운동을 좋아하여 방과 후에 학생들을 이끌고 운동장을 누볐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 가지고 돌아온 럭비공을 학생들에게 가지고 놀게 하였다. 당시 단수이중학에는 이미 축구부가 있었으나, 대만의 학교에서는 극소수의 일본인 학교를 제외하면 아직 럭비 운동이 없었다. 진청충은 학생들에게 공놀이만 시킨 것이 아니라 조직하고 훈련도 하였다. 1923년 대만인 최초의 럭비팀이 단수이중학에서 탄생하였다.
럭비는 팀의 정신을 중히 여기고 경기가 호쾌하였기에, 단수이중학 팀이 결성된 뒤 럭비는 무를 숭상하는 일본인에게도 중시되어 철도부 팀, 타이베이고등학교 팀, 타이베이고상 팀이 잇따라 창설되었다. 단수이중학은 중학교였고 나머지는 모두 대학·전문학교 청년 팀이었지만(일제 시대의 고교는 대학의 예비 학교로, 중학을 졸업해야 고교에 응시할 수 있었다), 단수이중학 팀은 일제 시대 내내 일본 팀에 지지 않는 영예로운 기록을 지켰다.
당시 모든 공개 운동 경기는 타이베이 신공원 운동장에서 열렸다. 일본의 통치에 승복하지 않던 대만인들은 대만 민중에게 통쾌함을 안겨 주는 이런 럭비 경기를 자주 보러 가서 단수이중학 팀에 갈채를 보냈다. 그뿐 아니라 단수이중학 팀은 1932년 10월에 친선 방문차 대만에 온 영국 친선 군함 캠벌랜드호(Cumberland) 팀을 물리쳐 전 대만에 이름을 떨쳤다.
단수이중학 럭비부가 당할 자 없는 강팀이 된 관건은 진청충, 가설해(柯設偕) 등의 교사에게 있었다. 그들은 선수들에게 기본 동작을 탄탄히 할 것을 요구하고 훈련을 엄격히 하였으며, 여기에 단수이중학 전통의 팀 정신이 더해졌다. 그리하여 경기에서 동작이 민첩하고 속도가 빠르며 호흡이 잘 맞아 상대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애석하게도 일본인이 단수이중학을 접수한 뒤 이 팀은 한때 중단되었고 전후에야 다시 나섰지만, 럭비는 이미 담강 정신의 표상이 되어 있었다.
음악과 체육 외에 종교 교육의 훈도도 단수이중학의 특색이었다. 학생 대부분이 기숙하여 심신의 지도가 더 많이 필요하였으므로, 학교에 충분한 종교 활동이 있었을 뿐 아니라 학생들은 일요일이면 단수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학교의 적지 않은 교사와 선교사가 심리 상담의 일에 적극적으로 힘썼는데, 그 가운데 교장 부인인 매케이 부인(偕仁利) 여사가 가장 열심이었다. 그는 특히 성경 교육을 중시하고 해마다 여름 성경 학교도 조직하여, 학생들이 건전한 심신의 발달을 이루게 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교회 지도자를 길러 냈다. 이 전통적 특색은 오늘날에도 담강에 이어지고 있다.
03일본 정부의 압박과 강제 접수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난 뒤, 대만의 교육 당국은 '국민정신 진흥'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미션스쿨 안의 교육 정신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른바 애국 단체였던 '황정회(皇政會)' 등은 이를 빌미로 미션스쿨의 '비애국적 정신'을 공격하며 미션스쿨에 손을 뻗치려 하였다. 1933년에는 신사 참배 문제로 '타이난 장로교중학 사건'이 일어났고, 당시 타이난주 지사 이마가와(今川淵)는 이 기회에 타이난의 남녀 두 학교를 강제로 접수하려 하였다. 다행히 남부 교회는 타이베이 일본 기독교회의 도움을 받아 이사회를 개편하고 일본인 교장을 새로 초빙함으로써 사건이 해결되었다. 그러나 단수이중학은 그만큼 운이 좋지 못하였다.
'황정회'는 타이베이에서 회의를 열어, 단수이중학과 단수이여학원 두 학교의 부지는 청국의 불평등한 시대의 '영구 조차지'인데 지금은 '쇼와의 성대(聖代)'인데도 어찌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조차지가 일본의 '황토(皇土)'에 남아 있도록 허용하느냐고 공격하였다. 이는 교회가 학교의 경영권을 포기하도록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1935년 8월, 단수이중학을 경영하던 교사회(敎士會)는 날로 어려워지는 시국에 대응하기 위하여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케이 교장을 해임하고 일본어에 능통한 맥밀런 목사를 교장으로 초빙하는 외에, 퇴역한 일본군 소위를 교관으로 초빙하여 군사 훈련 과정을 시행함으로써 두 학교의 무사함을 얻고자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타이난 장로교중학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인 타이난주 지사 이마가와가 이때 북상하여 타이베이주 지사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그때 단수이중학에서 가르치던 일본인 교원 스즈키 이사무(鈴木勇)가 사직하고 귀국하면서 교사회의 관리 아래 있는 단수이의 두 학교가 시국에 협조하지 않고 '비애국적 정신'을 고취한다고 신문계에 무고하였다. 이 풍파는 두 중학의 존속 문제에 다시 불을 붙였고, 오래도록 기회를 노리던 이마가와에게 틈을 주었다.
이마가와는 즉시 타이베이주 지사의 이름으로 단수이중학과 단수이여학원을 자신이 조직한 단체의 경영에 양도하도록 교사회를 협박하고, 동시에 교사회가 따르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1936년 8월, 타이베이의 교회와 일본인 신자들이 이 무리한 요구를 교사회가 해결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을 때, 이마가와가 파견한 학무과장 다치카와 요시오(立川義男)가 예고 없이 두 학교를 접수하러 와서 교장의 직무를 강제로 대행하였다. 실은 교사회는 이마가와의 협박 아래 양보하지 않을 수 없어, 두 학교의 부지를 9만 원의 은행권에 일본인에게 넘기고 두 학교의 모든 건물과 설비도 무상으로 양도하여 그들이 쓰도록 하였던 것이다. 또 두 학교 사이에 있던 부녀의숙(婦女義墊, 婦學堂)도 그 부지를 강제로 넘겨야 하였다. 실제로 두 학교의 토지만 하여도 당시 적어도 40만 은행권 이상의 가치가 있었으니, 이마가와의 행위는 강탈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두 학교 옆에는 선교사 사택 네 채 외에도 부녀의숙과, 옥스퍼드 학당에서 수업하던 '타이베이신학교'가 있었는데 모두 아직 캐나다 교사회의 관리에 속하였다. 그러나 각지에서 배영·배미 운동이 격렬해지자 교사회는 타이베이신학교와 단수이의 재산을 대만 장로교회 북부중회의 경영으로 넘겼다. 전쟁이 일어나려 하고 시국이 긴장되는 것을 보고 이 선교사들은 영국 영사의 명에 따라 잇따라 귀국하였다. 1940년 9월 일본이 추축국에 가담하여 공공연히 영국과 미국을 적으로 삼았다. 그해 말에는 전 교장 매케이 부부도 캐나다로 돌아가, 대만을 마지막으로 떠난 선교사가 되었다.
이로써 단수이중학은 선교사의 시대를 마치고 일본인이 학교를 다스리는 시대로 들어갔다.
매케이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이 매케이 부부를 배웅하는 모습(1940년 11월 20일). 그는 대만을 마지막으로 떠난 선교사였다.
04문무를 겸비한 진청충 교장
진청충 선생은 1895년 5월 14일에 태어났으며, 매케이 박사의 제자인 진영휘(陳榮輝) 목사의 차남이다. 옥스퍼드 학당 5년제 보통과(단수이중학의 전신)를 졸업한 뒤 캐나다 교사회의 선발로 일본 도시샤대학에 유학하였다. 재학 중에는 그 학교 럭비 대표팀의 주장으로 팀을 이끌고 경기에 나가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전 일본에 이름난 운동 스타가 되었다.
1921년 선생은 모교 단수이중학으로 돌아와 영어를 가르치며 대만 최초의 럭비팀을 훈련하여 창단하였고, 이로써 '대만 럭비의 아버지'라는 존칭을 얻었다. 이 밖에 진청충 선생은 음악 교육에도 힘을 기울여 단수이중학에서 대만 최초의 남성 합창단(TMS Glee Club)을 조직하였다. 1926년 6월 28일 여름방학에 그들은 '이나바마루(因幡丸)'를 타고 지룽에서 출항하여 일본을 순회 공연하였고, 그로써 '대만 합창의 아버지'로 일컬어졌다. 비교적 덜 알려진 사실은, 진청충 선생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대만어로 옮겨 무대에 올린 첫 사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 밖에 진청충은 교회의 신앙 운동에서도 큰 영향력을 지녀, 1933년에는 일부 교회 인사들과 함께 '대만 북부 기독장로교회 장집연합회'를 발기하였고, 진청충은 그 주요 구성원으로서 『북부전도사회 회지』를 발행하여 교회의 혁신 역량이 되었다.
전후에 진청충은 순덕여자중학(純德女中) 교장을 6년 동안 지냈고, 1947년에는 '대만 럭비협회'의 조직을 발기하여 1960년 4월 6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럭비 운동을 계속 추진하였다.
진청충은 담강의 뛰어난 선배였을 뿐 아니라, 음악과 체육으로 문무를 겸비한 학풍을 이끌었다.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담강은 1968년부터 해마다 '청충배' 럭비 대회를 열고 있으며, 럭비는 담강중학의 가장 중요한 전통 종목이 되었다. 또한 남성 사중창과 합창단의 유려한 노랫소리도 이미 오래전부터 교정 문화의 일부가 되어 오늘까지 끊임없이 불리고 있다.
05질주하여 트라이하는 모습─담강중학 럭비부
06영국 신사의 불량배 운동
담강중학 럭비의 역사는 곧 대만 체육의 영광스러운 역사이다. 담강중학 운동장은 대만 교육사에서 풍운이 모인 자리이며, 대만의 럭비 운동이 바로 이곳에서 발원하여 자라났다. 대만 럭비 운동의 발전을 돌아보고 진청충 선생이 공을 전한 공로를 기리노라면, 오늘도 담강중학 럭비부는 여전히 경기장을 달리고 있으며, 용감·분투·단결·복종의 럭비 정신은 이미 오래전에 담강중학이 대대로 추구하는 전통 정신이 되었다.
담강중학이 창교될 무렵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에 해당하여, '탈아입구'의 전면적 서구화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영국 상류 사회의 축구와 럭비 운동이 유행이 되었다. 특히 '신사의 불량배 운동'이라는 별칭을 가진 럭비는 일본 사회가 더욱 숭상하던 것으로, 진청충은 일본 유학 시기에 마침 그 성황을 몸소 겪었다.
진청충은 모교로 돌아와 가르칠 때 럭비 운동도 교정에 전하여 학생들이 놀이 속에서 배우게 하고 기풍을 이끌었으며, 나아가 훈련하고 팀을 꾸려 1923년 대만 최초의 럭비팀─단수이중학 팀을 창단하였다.






07패스하여 트라이하던 시대
단수이중학은 팀을 창단한 뒤 1924년 타이베이에서 일본인이 조직한 '타이베이 연합팀'을 3 대 0으로 처음 꺾은 것을 시작으로, 일제 시대 내내 당할 자가 없어 일본 팀에 지지 않는 기록을 지켰다. 영예로운 전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일본의 통치를 받던 대만인을 위하여 민족의 존엄을 얻어 냈다. 1932년에는 대만에 와 도전한 강팀인 영국 극동함대 캠벌랜드호(Cumberland) 팀을 꺾어 명성이 크게 높아지고 나라 안팎에 위세를 떨쳤다. 애석하게도 1936년 단수이중학이 일본인에게 강제 접수된 뒤, 빛나는 전적의 단수이중학 팀은 부득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십여 년 동안 단수이중학 팀은 대만 럭비 운동에 굳고 영예로운 토대를 놓았다.





08공을 혼으로 삼던 시대
제2차 세계대전 후 한동안 조용하던 담강 럭비부가 다시 나섰고, 대만 남북 각 학교의 팀도 잇따라 창단되었다. 1968년 2월 담강 동문들은 정식으로 '담강중학 O.B. 럭비 클럽'을 설립하여 모교 후배 선수들의 양성과 훈련을 돕고 담강의 럭비 정신을 끊이지 않게 이어 갔다. 이때부터 팀은 활발히 발전하여 국내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 상을 받아 전 대만에 이름난 강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거듭 좋은 성적을 내며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근 백 년 동안 단수이 포대 푸딩(砲台埔頂)의 담강중학은 럭비 운동을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 왔고, 단수이는 이미 국제적인 럭비의 요지가 되었다.








일본인이 단수이중학을 접수한 뒤 체육관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본래 체육 수업과 종교 예배, 학교 행사, 그리고 교회의 중대한 경축 행사를 여는 장소였으나, 일본인은 이를 엄숙한 무도장으로 바꾸어 무덕을 닦는 '무덕전(武德殿)'으로 삼았다. 사진 속 벽에는 '발랄감위(潑刺敢為)' 네 글자가 바꾸어 걸렸고, 가운데 진열된 것은 일본 무사가 받들어 모신 문천상(文天祥) 충효비의 탁본이며, 성경과 십자가의 교표는 이미 남아 있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