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상징

학교의 상징정신의 상징

교표, 교훈, 교가, 그리고 1844년부터의 연표.

교사관의 중국어 원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둘이 다를 경우 중국어 원문이 기록입니다.

01교표

담강중학(淡江中學)의 교표는 간결하고 알아보기 쉬워 창학 정신과 특색을 가장 잘 드러낸다. 그 도안은 오늘날 보아도 매우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교표는 창립 당시의 교장 조지 윌리엄 매케이(偕叡廉)가 1914년 4월 1일에 직접 설계하여 확정한 것이다. 십자가 위에 성경을 얹은 형상으로 학교의 교육 정신을 나타낸다. 종합교학관 외벽에 부조로 새겨진 성경 구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 9장 10절)가 보여 주는 바와 같다. 이 건물의 정초 때에도 뜻을 밝히기 위해 성경을 묻었다.

교기와 교복 외에, 담강중학의 가장 큰 특색은 교정 곳곳에 교표 도안이 여러 형태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02교훈

담강중학은 “사랑과 봉사”(愛與服務)를 교훈으로 삼고, 대만기독장로교회의 “불타지만 소멸되지 않는다”는 전통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1914년 개교 후에는 히브리서 12장 1절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를 “표어”(정신의 지표)로 삼아, 교회 학교로서의 기독교 신앙을 드러냈다. 1925년 학교의 팔각탑이 낙성되었을 때에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의 바울의 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에 따라 정문 입구 위쪽에 “신망애(信望愛)” 세 글자를 새겼고, 팔각탑도 “신망애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신애망(信愛望)”이 오히려 본래의 “표어”보다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담수여학교는 “사랑과 봉사”(愛與奉仕)를 교훈으로 삼았고, 강당 겸 여학생 체육관 홀의 바로 위쪽에도 “愛與奉仕”라는 교훈이 새겨져 있었다. 여학교는 전후에 순덕여자중학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사랑과 봉사”(愛與服務)를 교훈으로 삼았다. 1956년 남녀 두 학교가 합병한 뒤에도 오늘날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다.

1935년 사립 담수중학 명부(학생 수첩)
1935년 사립 담수중학 명부(학생 수첩)

03교가

담강중학의 교가는 가사와 선율이 그윽하고 아름다워 담강의 학생들이 백 년 동안 불러 왔으며, 대만에서 가장 감동적인 교가로 일컬어진다.

교가의 가사는 초대 교장 조지 윌리엄 매케이의 부인 매케이 여사(偕仁利)가 지었고, 곡명은 “Our Word Shall Be Our Bond”이며, 곡조는 미국 애머스트 대학의 교가에서 따왔다. 초기에는 영어 가사만 있어 학생들이 영어로 불렀으며, 이것이 담강의 큰 특색이 되었다.

일본인이 담중을 접수했을 때에는 “건아의 노래(健兒之歌)”로 이를 대신한 적이 있다. 전후에 담강 교가는 다시 교정에서 불렸고, 1955년에 처음으로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1956년 남녀 두 학교가 합병한 뒤 류팡(劉芳) 선생이 다시 번역하여 오늘날 교가 가사의 내용이 되었다. 학교 집회나 동문 모임 때마다 교가는 담강의 정신과 학교에 대한 정을 가장 잘 드러낸다. 특히 마지막 절의 가사 “아! 담강, 아름답도다! 담강, 산이 두르고 물이 감돌며, 바다는 푸르고 봉우리는 청청하다. 아! 담강, 아름답도다! 담강, 나는 한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리라.”는 담강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1934년에 등사한 담강 교가
1934년에 등사한 담강 교가
아리사카 교장이 지은 담수중학교 교가 〈건아의 노래(健兒の歌)〉
아리사카 교장이 지은 담수중학교 교가 〈건아의 노래(健兒の歌)〉
1955년에 번역된 담강 교가. 기독교 색채가 옅어졌다.
1955년에 번역된 담강 교가. 기독교 색채가 옅어졌다.
류팡 선생이 번역한 담강 교가(첫 구절 “T.M.S.”는 오늘날 “담강 교정(淡江校園)”으로 바뀌었다)
류팡 선생이 번역한 담강 교가(첫 구절 “T.M.S.”는 오늘날 “담강 교정(淡江校園)”으로 바뀌었다)

04주요 연표

매케이 흥학 연혁 관계 일람표
매케이 흥학 연혁 관계 일람표

05청국 시대

1844년

3월 21일, 조지 레슬리 매케이(馬偕)가 캐나다 온타리오주 옥스퍼드군의 조라 마을에서 태어났다.

1859년

매케이는 토론토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메이플우드와 메이틀랜드 초등학교의 교사로 일했다. 7년 뒤 토론토대학 녹스 신학원과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했고, 해외 선교사가 되기를 자원했다.

1871년

6월, 캐나다 장로교회 총회가 퀘벡에서 열려 매케이의 해외 선교사 자원 건을 승인하고, 중국을 그의 사역지로 정했다.

9월 19일, 총회의 위임을 받아 토론토 중회가 굴드가 교회(Gould street Church)에서 매케이를 목사로 안수했다.

10월 19일, 매케이는 가족과 작별하고 우드스톡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선교를 위해 길을 떠났다.

11월 1일, 기선 아메리카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하여 중국으로 향했다.

12월 29일, 쌍돛 범선 “금릉호”를 타고 대만에 도착하여 다거우(打狗, 가오슝)에 상륙했다.

1872년

3월 9일, 매케이 목사는 영국 여객선 “해룡호”를 타고 오후 3시에 담수에 상륙했으며, 담수를 대만에서의 선교 거점으로 정했다.

4월 10일, 담수의 좁은 골목에 집을 빌려 시골 목동과 현지 사람들에게서 대만어를 배우며 전도와 의료라는 고된 일을 시작했다. 같은 달 25일 첫 학생 옌칭화(嚴清華)를 얻었고, 이후 8년 동안 모두 스무 명이 넘는 학생을 얻었다. 이것이 본교의 개척기(Ltinerant College)이며, 학교 역사에서는 “소요학원(逍遙學園)”(Peripatetic School)이라 부른다.

1873년

2월 9일, 북부 대만 최초의 신자 다섯 명이 세례를 받았고, 담수교회가 세워졌다.

1878년

5월 27일, 매케이 목사는 우구컹(五股坑)의 여성 장충밍(張聰明)과 결혼하여 대만의 사위가 되었다. 매케이 목사와 장씨는 훗날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1879년

9월 14일, “후웨이 매케이 진료소(滬尾偕醫館)”가 낙성되었다.

1880년

매케이 목사는 처자와 함께 처음으로 귀국하여 보고에 임했고, 서쪽으로 남양·인도·중동·유럽을 거쳐 캐나다로 돌아갔다. 같은 해 캐나다 퀸스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81년

10월, 매케이 박사의 고향인 옥스퍼드군 사람들이 군청 소재지 우드스톡의 감리교회에서 송별회를 열고, 대만에 돌아가 학교를 세우는 데 보태도록 6215캐나다달러의 기부금을 건넸다.

1882년

1월 22일, 외아들 조지 윌리엄 매케이(偕叡廉)가 담수에서 태어났다.

7월 26일, “이학당대서원(理學堂大書院)”이 낙성되었고, 옥스퍼드군 사람들의 호의를 기려 영문 교명을 Oxford College(옥스퍼드 학당)로 정했다. 같은 해 9월 14일 개학하여 모두 열여덟 명의 신입생이 입학했으며, 대만 신교육의 발상지가 되었다.

1884년

3월 3일, 담수여학당이 개학했다. 대만 전체에서 최초의 여자 학교이며, 본교 여자부의 시작이다.

8월 5일, 청프전쟁이 일어났다. 북부의 교회는 큰 파괴를 겪었고 예배당은 심하게 손상되었다.

1891년

7월 3일, 매케이 박사가 엮은 《중서자전(中西字典)》이 상하이에서 간행되었다.

1893년

9월 6일, 매케이 박사는 온 가족과 함께 기선 “인도 황후호”를 타고 두 번째로 귀국하여 보고에 임했다. 귀국 후 매케이 박사는 캐나다 장로교회 제20회 총회 의장을 맡았다. 또 《From Far Formosa》를 집필했다(1895년 출간).

06일제 시대

1895년

일본군이 대만을 공격하여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매케이 박사의 가족은 11월 말에 대만에 도착했다.

1896년

노기 총독이 담수로 매케이 박사를 찾아와 교내 박물실을 참관했고, 그 뒤 사람을 보내 이곳을 촬영하여 기록으로 남기게 했다.

1901년

5월 31일, 매케이 박사가 위독해졌다. 임종 전에는 한밤중에 종을 쳐서 학생들을 학당 수업에 불러 모으기까지 했다. 후두암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어 칠판에 써서 뜻을 전했고, 학생들은 차마 볼 수 없어 그를 부축해 침상으로 돌려보냈다.

6월 2일 오후 4시, 매케이 박사가 담수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사흘 뒤(5일) 매케이 가족 묘원에 안장되었다.

1904년

5월 9일, 대만 북부 장로교회가 캐나다 모교회에 새 시대의 여자 교육과 중학교 설립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1907년

담수여학교가 옛 여학당 교사에서 다시 문을 열었고, 진런리 선생(Miss Janne Kinney)이 초대 교장이 되었다. 본교 여자 중등교육의 시작이다.

1910년

담수부학당 교사가 개학하여 사용되기 시작했다. 배움의 기회를 놓친 기혼 여성을 받아들여 대만 여성 교육과 취약한 처지의 여성을 돌보는 일의 선구가 되었다. 가오하나 선생(Miss Hannah Connell)이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11년

12월 4일, 매케이 박사의 외아들 조지 윌리엄 매케이는 학업을 마친 뒤 캐나다 장로교회로부터 선교사로 임명되어, 새로 결혼한 부인이자 초등학교 교사인 진 로스(Jean Ross)와 함께 대만으로 돌아와 대만에 정식 중학교를 세울 준비를 했다.

1914년

3월 9일, 일본 정부로부터 정식 설립 허가를 받았다. 이날은 42년 전 매케이 목사가 담수에 상륙하여 학교를 세운 기념일이기도 하여, 훗날 본교의 개교기념일로 정해졌다. 4월 1일 담수중학교가 옥스퍼드 학당에서 정식으로 개학했고, 조지 윌리엄 매케이가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16년

담수여학교의 새 교사가 낙성되어 6월 1일 개학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고, “담수고등여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교사는 1999년까지 본교 여학생부의 교실과 기숙사로 계속 쓰였다.

1922년

2월, 일본 정부의 새 법령에 따라 본교의 남자부와 여자부는 각각 “사립 담수중학”과 “사립 담수여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3년

5월, 담수중학 체육관이 준공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천칭중(陳清忠)이 조직한 대만 최초의 럭비팀인 담수중학 럭비팀이 창단되었다.

1925년

담수중학의 새 교사인 팔각탑이 준공되었고, 6월 1일 학생들이 새 부지로 옮겨 수업을 받아 오늘에 이른다.

1936년

11월, 일본 정부의 황민화 교육 정책에 따른 수년간의 압박 끝에 남녀 두 학교는 일본이 조직한 재단법인에 경영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1938년

일본인 교장 아리사카 잇세이(有坂一世)의 적극적인 경영으로 일본 정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본교의 남녀 두 학교는 각각 “사립 담수중학교”와 “사립 담수고등여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9년

가을, 일본 측 학교 당국은 양도 당시 양측이 약속한 바에 따라 “매케이 박사 기념도서관”을 짓고 매케이 박사의 동상을 세웠다.

1940년

대만 북부 장로교회는 담수의 선교사 숙소 안에 “타이베이 신학교 고등여학부”를 다시 설립했다. 이듬해 5월 타이베이 솽롄의 미야마에초로 옮겼고, 이후 “타이베이 미야마에 여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여 담수중학교, 담수고등여학교, 타이베이 미야마에 여학교 세 학교가 대만 북부 장로교회로 돌아왔다.

07중화민국 시대

1947년

4월 16일, 남녀 두 학교가 합병하여 새 법령에 따라 “사립 담강중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남자부와 여자부로 나뉘었다. 9월에는 “사립 중산여자중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던 옛 “미야마에 여학교”도 담강중학 여자부에 통합되었다.

1948년

7월, 남자부와 여자부가 나뉘어 운영되었고, 여자부는 “사립 순덕여자중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3년

7월, 순덕여자중학의 음악 전공과가 예술 보습반으로 확대되어 음악, 미술, 가정, 유아보육의 네 과로 나뉘었으며, 대만에서 가장 이른 전문 중학이었다. 같은 해 순덕유치원을 부설했다.

1956년

10월 6일, 남녀 두 학교가 정식으로 합병하여 “사립 담강중학”이 되었고, 천쓰즈(陳泗治)가 합병 후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62년

3월, 남학생 기숙사가 낙성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1963년

7월 20일, 담강중학 창립자 조지 윌리엄 매케이 박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 담강 교정 안의 매케이 가족 묘원에 안장되었다.

1966년

3월 9일, 본교의 대예배당 겸 종교활동센터가 낙성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사립 담강고급중학”으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87년

일본 메이케이학원 고교가 방문하여 담강의 국제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 필리핀, 캐나다, 한국 등의 학교가 잇따라 본교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1990년

9월 1일, 여학생 교실동(오늘날의 고1동)이 새 학기에 낙성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1994년

8월, 음악반과 미술반을 설치했다. 본교의 다원적인 학교 운영이 시작되었다.

1996년

본교는 종합고등학교를 설립했다. 학술 과정의 자연계, 사회계 외에 정보, 미술공예, 유아보육, 상업경제, 그리고 영어, 일본어 등 외국어 과정을 두어, 재능에 따라 가르치고 적성에 맞게 발전시킨다는 본교의 교육 목표를 실현했다.

2000년

3월 4일, 종합교학관이 낙성되어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본교가 21세기로 들어서는 선도적 건설이다.

6월 27일, 본교 야오충룽(姚聰榮) 교장이 교사와 학생으로 이루어진 줄다리기 팀을 이끌고 캐나다로 뿌리를 찾아가, 담수진과 옥스퍼드군의 자매도시 결연을 도왔다. 우드스톡 시청과 캐나다 장로교회 총회를 예방하는 한편, 매케이 박사의 손자 네 사람과 회포를 풀었다. 이 방문은 본교가 국제화로 나아가고 학교 운영의 영역을 넓히는 선도적 행동이기도 했다.

2001년

6월 2일, 매케이 박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우정총국이 기념우표를 발행했고, 대만에서 일련의 기념행사가 열렸다. 매케이 박사의 3대인 존 매케이(偕約翰) 박사가 담강중학에 돌아와 추모 행사에 참여했다.

12월 15일, 1925년에 지어진 여학생 체육관을 개조한 순덕유치원 교사와 유아보육 교실이 완공되어 사용되기 시작했고, “담강 유아보육” 교학단지가 만들어졌다. 본교에서 처음으로 되살아난 고적이다.

2002년

3월, 조지 윌리엄 매케이 기념공원이 낙성되었고, 공원 안의 학교역사관, 대만 농촌문물관, 실습 상점 심근원(尋根園), 원주민 석판집이 같은 날 정식으로 개방되었으며, 조지 윌리엄 매케이의 셋째 딸 마례 매케이(偕瑪烈)가 직접 제막했다.

8월, 본교는 이중언어 교육을 강화하여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고 영어 수준별 수업을 도입했다.

2003년

3월, 본교는 럭비 80주년을 기념하여 대만 럭비 시축 기념비를 세웠다.

2004년

3월, 본교 남자중학부 설립 90주년을 기념하여 “담중원(淡中園)”과 “푸딩 종탑(埔頂鐘塔)”이 낙성되었고, 리덩후이 총통이 제막하고 종을 울렸다.

2005년

2월, 본교는 암벽등반탑을 세워 탐색교육을 추진했다.

3월, 팔각탑 건립 80주년을 축하하여 개교기념 행사를 열었다.

6월, 제1회 성장캠프로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가오슝 라오눙시로 래프팅을 떠나, 종래의 졸업여행 방식을 바꾸었다.

2006년

3월, 옛 여학부 교사인 순덕관 건축 90주년을 맞아 감사예배를 드렸다.

2007년

3월, 대만 “2·28 사건” 60주년을 맞아 본교는 “푸딩 2·28 수난 기념비”를 세워 학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스승들을 기렸다.

3월, 초등부를 창설하고 옛 순덕관(선루, 善樓)을 초등부 교사로 개수했다.

2008년

3월, 예능관과 온수 수영장이 낙성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2011년

6월 4일, 초등부의 새 교실동 “순덕보(純德堡)”가 낙성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2014년

3월, “담수중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2016년

임간 교실(용풍정, 榕楓亭)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2018년

인문사회반을 개설하여 “배려”의 시야 위에서 지역에 깊이 뿌리내리고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